2009-11-06

박정희는 훌륭한 리더였는가


  어제 박정희가 만주 관동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쓴 사실을 민족문제연구소가 언론을 통해 공개하였다. 이 인물의 족적을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걸어온 거지 같은 근현대사의 질곡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원래는 사범대를 졸업하여, 미개한 조선인을 훌륭한 황국신민을 교육하는 성스러운 직업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는(이미 여기서부터 훌륭한 친일 부역자다) 이것만으로는 모자랐던지 만주군관학교를 입학, 만주군에 투신하게 된다. 여기서 그가 만주군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역으로 끌려간 다른 생도병들과는 다르게, 그는 자발적으로 일본군 장교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학도병들 운운하며 박정희도 그런 케이스라고 주장하는 건, 군 복무를 위해 2년 동안 끌려가는 현역 장병들과 육사 또는 ROTC, 3사관학교 등을 졸업하여 장교로 복무하는 직업 군인들이 같은 군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경우가 없는 헛소리일 것이다. 여하튼 자발적으로 일본군 장교의 길을 선택한 박정희는 일본을 위해 일을 하였다. 그가 독립군을 때려잡는 역할을 했는지, 아니면 중일전쟁을 위해 뛰었는지, 그냥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위해 점령지인 만주의 치안 유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혈서까지 쓰면서 투철한 군인정신을 보여준 식민지의 청년이자 내선일체의 구호를 온몸으로 실천한 산 증인이었다.

  이런 박정희는 광복이 된 후, 당시 대표적 좌익단체인 남로당에 입당한다. 왜일까. 제국주의자가 깨달음을 얻어 사회주의자로 급 전향을 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친일 경력을 덮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였을까. 혹은 해방 직후의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주의가 대세였기 때문에 그냥 대세를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남로당에 입당했다고 김일성 따까리였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남로당은 어느 정도 김일성의 북로당과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기도 한 데다가, 박정희 그는 정식 남로당 당원도 아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남로당의 사람들과 한 때 같은 행동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문제는 그 활동 역시 남로당의 몰락 시점과 '우연히' 겹치며 중단된다는 것이다.

  박정희 개인을 위해서는 천만 다행히, 그는 적절한 시점에 남로당과 결별하고 철저한 우익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뜻을 같이 하던 남로당 당원들을 삭 팔아먹으며 전향을 했다고도 하는데, 이건 내가 정확히 모르니 일단 패스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한국 군대 내부에서 그는 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그의 능력이 출중해서일듯싶다. 그 능력이란 게 군인으로서의 능력인지, 시류를 잘 읽고 훌륭하게 처세하는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넘어가기로 한다.

  그리고 무려 소장까지 승진한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일으키며 이 나라에 군부 독재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친일파가 국민 주권을 짓밟고 한 나라의 대표인 대통령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행동을 죽 보아도, 그는 민주라는 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행보를 지속해 나아간다. 지방자치제도 폐지하고, 군, 관을 동원한 관건 선거 및 여론 조작도 훌륭했다. 입법부는 스스로 결정 능력이 없는 있으나마나한 조직이었다. 사법부는 지금까지도 사법 역사상 치욕적이라고 불리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법살인을 행하는 등, 역시 마찬가지의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존재했다. 근대 국가의 기본적 조건인 삼권분립 따위는 시바스 리갈에 말아 드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예전 2천만의 신민을 거느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여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의 군왕 따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박정희의 신화가 시작된다. '우왕 박정희가 집권하더니 경제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졌어염. 역시 지도력과 청렴함이 빛나는 박통 짱'등의 헛소리가 지금까지 통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는 '박정희가 민주화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경제 발전을 시킨 것도 분명하니 그 공과는 나누어 인정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도 한다. 물론 한국 경제 발전에 '박정희'로 대표되는 강력한 행정국가의 개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뭐 독일에 광부 간호사를 수출하고, 베트남에 미국 용병으로 군인을 수출하고, 일본의 만행을 잊어주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오기는 했지만, 이건 다 경제발전 한마디로 미덕으로 치장된다. 전태일로 대표할 수 있는 엄청난 저임금과 악질적인 노동 착취가 당연한 듯이 행해졌지만, 이것 역시 첫 10억불 수출 기념이라는 업적에 전부 가려진다. 

  물론 우리나라와 같은 후발국가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초기 경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자본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말을 지껄일 것이라면, 한국 경제의 발전이 박정희 때문이라는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한국 경제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피땀으로 발전한 것이지, 모 유명 연예인과 여대생을 끼고 시바스 리갈을 쳐 마시다 총에 맞은 박정희 각하의 공로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하나, 지도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박정희의 국가 헌신적인 마음과 경제 발전을 위한 의지, 그리고 그를 위하여 행정 조직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였다며 그가 훌륭한 지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같은 군사독재의 결과 몰락한 남미나 아프리카의 군벌들에 비교하면 박정희가 훌륭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으시겠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의 비교 대상이 나라 말아먹은 군벌들이라서. 비교할 거면 금이랑 비교해야지 똥통 속 똥들이랑 비교해서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는 저 작태부터가 웃기다는 이야기이다. 아, 물론 똥 중에서는 깔끔한 편인 똥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또 동의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박정희가 그렇게 청렴했다면, 그 딸인 박근혜 옹이 이사장을 역임하셨었던 정수장학회(현재 부산일보 지분 100%, MBC 지분 30% 소유)는 어디 하늘에서 돈이라도 떨어져서 생긴 것인가 보다. 아 이렇게 말하면 박정희에게 개인재산인 부일장학회를 강탈당하신, 원 소유주이셨던 고 김지태 님께 엄청난 실례가 되는 건가 쩝쩝

  하긴 뭐 당시 박정희를 위시한 사회 지도층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일제 치하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 전문인력이 부족하다는 미 군정의 판단 하에 사회의 요직을 다시 꿰차고 있던 한국 정부는 애초에 정통성 자체가 크게 약한 정부였으니까. 우왕 게다가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하기까지 했다. 이런 경우, 정부의 지배력은 경찰력과 군사력 등의 강력한 물리적 공권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당시의 대한민국은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천 년 이상 살아온 국민의 문화적 전통과, 일본의 식민지 기간을 거치며 국민과 괴리되어 생성된 엄청나게 비대한 관료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분단국가라는 특수성 덕분에 군경 및 정보기관도 굉장히 비대하게 출발하였고. 아마 이러한 요인과 미국의 도움마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북베트남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길게 가면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모든 국가는 국민을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는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는 자체적으로 내재하고 있던 모순점을 숨기기 위해 다른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것이 반공과 경제발전이었다. 반공으로 국민들의 증오 대상을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로 바꾸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경제발전이라는 환상을 눈앞에 재림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지들이 계속해 먹기 위해서라도 경제발전을 시켰어야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 발전의 의지만 있었다면, 박정희가 아니라 다른 누가 대통령을 해도 박정희와 비슷한 경로를 걸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경제발전을 위한 초기 자본 마련을 위해서 노동을 수탈하는 것은 그 대상이 선진국들은 식민지의 노동력이고, 후발 국가들은 자국의 노동자라는 점만 다르지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정희가 취한 경제정책 역시 1920년 이래로 활용되어 충분히 검증되고, 당시에는 한창 진리라 여겨졌던 케인즈적인 발전국가 경제 모델이었다. 박정희가 뭐 미래에서 뚝 떨어진 선지자처럼 대단한 무엇을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정통성이 쩌는 줄 알고 21세기를 맞은 사회에 이 모델을 적용시키려는 주어 없는 위대한 분도 계시지만, 이와 비교하는 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어느 똥이 더 깨끗한가를 논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뭐, 어찌 보면 이 글은 박정희를 싫어하는 한 사람이 그의 업적은 깎아내리고 나쁜 점만 엄청 부각해 쓴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분들 시각에서는 그게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분들 말이 다 맞다고 양보한다고 해도, 저런 사람을 민족의 지도자라고 부르는 건 제발 그만둬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크게 양보해서 '훌륭한 독재자'까지는 인정해 줄 테니, 제발 본받자고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이다. 차라리 박정희를 찬양할 바에는 스탈린이나 히틀러를 찬양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경제성장률 9% 달성 지도자보단, 패전 후 피폐한 독일 산업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구미 열강들과 맞먹을 군사력을 다시 재보유한 히틀러나, 농토밖에 없던 소련에 20년도 되지 않아 최첨단 중화학 공업을 유치하여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을 만든 스탈린 쪽이 더 멋지지 않은가? (참고로 스탈린의 신경제정책(NEP)의 기본 골자를 그대로 따온 것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게다가 그 두 독재자들은 침략자의 국가를 위해 충성하겠다는 혈서를 쓰지도 않았고 말이다. 히틀러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잘 싸웠다고 독일 정부에서 1급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었지 아마.


p.s. 아나,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이 따위 떡밥이 횡횡하는 건지 모르겠다.

문제는 이 떡밥이 엄청 중요하게 제도 주류 정치권에서도 논의되고 있다는 거다.

아니 이게 애초에 논의의 대상이나 되는 일인가?


  뭐, 그래도 박정희가 훌륭한 지도자라면 한 가지 희망이 생기기는 한다. 웬만한 사람은 다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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