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1

[애니메이션] 최근 이세계 애니가 범람하는 이유에 대한 추론


이세계라는 단어가 해당 장르를 통칭하는 뜻으로 인터넷상에서 흔히 쓰이고 있어 제목에 해당 단어를 기재하기는 하였지만, 이세계는 표준어 단어가 아닌 속어입니다. '(원래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을 일본에서 한자로 '이세계'로 표기하던 것이 국내에 그대로 차용된 단어로, 부끄러운 과거를 의미하는 '흑역사'라는 단어와 도입 경로가 비슷하다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거의 보지는 못 하지만, 가끔 시간이 날 경우에도 예전만큼 손이 가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행동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유로 '이세계(異世界) 물이 너무 많다'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인공이 자신이 살던 원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여 사건사고를 겪고 모험을 하는 이야기 자체는 소설 등의 창작물에서 매우 유서 깊은 설정이기는 합니다. 애니메이션 쪽에서만 보더라도 1990년대 십이국기나 2000년대 제로의 사역마 등과 같이 흔히 쓰이던 소재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이 장르에 해당하는 작품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이동하는 방법도 거의 비슷한 게, 게임 속에서 이세계로 전이되거나 사고(주로 트럭 추돌사고)로 인한 사망으로 이세계로 전이 또는 전생하는 방식입니다. 오죽하면 일본 인구의 감소 이유가 젊은이들이 모두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가서라는 인터넷 유머가 격하게 공감될 정도이니까요. 

  이동하는 이세계 역시 거의 천편일률적입니다. 우선 신이 존재하고, 신으로부터 여러 가지 힘을 받게 됩니다. 혹시 신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언어 소통에는 문제가 없도록 해 주는 능력은 어떠한 방식으로던지 획득하게 됩니다. 전생(轉生, 다시 태어남)의 경우에는 언어 관련 능력은 예외가 되지만, 반드시 이전 생에 관한 자세한 기억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몇 년간의 영유아기를 거친 뒤에도 마치 어저께 갓 공부한 듯한 생생한 기억력은 덤이고요. 두 번째는 주로 게임 기반 이세계물에 해당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수치 및 문자화되어 나타납니다. 작품은 달라도 마치 전 차원의 고유 언어처럼 매번 같은, 이제는 부르기에 민망하고 부끄러운 그 이름, '스테이터스' 한 마디에 주인공의 눈앞에 체력/마력/스킬/숙련도 등이 표기된 상태창이 나타납니다. 또한 문명 수준은 중세 유럽(이라 작가가 생각하는) 문명 수준에 마법 등의 특수한 힘이 존재하는 독창적인 세계……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반지의 제왕 및 던전 앤 드래곤즈(D&D)의 아류 세계관에서 파생된 세계가 대부분입니다. 일단 최소 마왕/엘프/고블린/오크/뱀파이어/좀비 중 하나는 반드시 나옵니다. 그리고 궁극의 최종병기인 일본도…… 왜도가 좋은 무기 중 하나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고, 저 작품들이 일본에서 나오므로 작가와 시청자에게 친숙한 소재를 쓰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왜도가 절대병기이자 궁극의 치트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초 왜도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경장갑 보병을 대상으로 높은 전투 효과를 입증해서인데, 중장갑 기병 및 보병이 병종의 중심이 되는 세계에서도 큰 문제없이 절대병기의 위상을 차지하니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물론 이세계물 장르의 범람 하나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전체를 싸잡아 문제가 있다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일단 시기별로 특정 장르가 유행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 장르를 불문하고 있어 온 일이었고, 개인적으로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이세계물의 범람보다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다른 문제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애니메이션 제작에 투입되는 사회적 자원에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이세계물이 전체 애니메이션 작품 중 상당 포지션을 차지하여 다른 장르의 비중이 줄어드는 작금의 현실이 왜 발생하는가에 대한 가벼운 고찰을 해 볼까 합니다.


1. 미디어 믹스

  하나의 콘텐츠(지식재산권, IP)를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전개, 유통하는 행위를 일본에서는 미디어 믹스(Media Mix)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이세계물 애니메이션의 경우 절대적으로 일본에서 제작되는 콘텐츠가 많기 때문에 미디어 믹스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디어 믹스가 진행될 경우 하나의 IP가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소설(주로 라이트 노벨) 등으로 뻗어 나가는데, 이러한 경우 최초 인기를 얻게 된 IP가 나온 매체를 제외한 나머지 매체는 모두 하나의 완결된 세계가 아니라, 다른 작품의 보완적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떠한 소설이 인기를 얻어 그 작품의 세계관 및 캐릭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든 경우, 애니메이션의 제작자는 이 작품을 볼 사람들이 소설을 미리 접했을 거라는 가정을 하고 작품을 만들기에 설정이나 배경 지식에 대한 설명을 잘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작품의 진행을 통해 설정이 드러나도록 구성을 하지도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 경우 타 매체를 제외하고 작품을 볼 경우 세계관부터 캐릭터 성격까지의 제반 설정에 시청자가 쉽게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간단히 말하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와 '줄거리가 개연성 없이 진행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반론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애초에 이 작품의 타겟이 '기존 IP에 익숙한 시청자'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경우 다 알고 있는 배경 설정 등을 다시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작품의 집중에 방해가 된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해당 애니메이션이 '독립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러한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이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줄거리의 구성이 부실한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한 작품을 양질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2. 줄거리 구상의 용이함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퓨전 판타지라고 불리는 소설 장르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그 글을 쓰는 작가들이 당시 유행하던 무협지나 판타지와 같은 장르에 많은 지식이 있어, 그 지식을 바탕으로 줄거리를 짜기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무협지는 중국 및 대만의 무협소설 및 홍콩 영화에서 정립된 세계관을, 판타지는 반지의 제왕 및 D&D,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된 RPG 게임을 바탕으로 2000년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이 관련 매체를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공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작품을 만들 경우, 현실이 배경이라면 줄거리 전개에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제약을 아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는 아무리 주인공을 세계강 최강자로 만들어도 총 한방, 수류탄 하나의 제약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판타지라면 꿈의 9 서클 마법을 습득한 대마법사로 만들어 주면 이 모든 제약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무협지라면 기연과 절대비급, 단약과 금강불괴라는 수단이 있고요. 결국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는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굉장히 용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류사가 진행되어 오면서 나온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주인공의 능력을 작품 안에서 돋보이게 하기가 굉장히 용이합니다. 만약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에서 주인공이 '숯과 황, 질산칼륨을 혼합하여 화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좁은 통 안에서 불을 붙이면 폭발력이 집중되어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어요'라고 주장한다면 기껏해야 '교육 잘 받았네'나 '그런 걸 총이나 포라고 부르잖아'라는 수준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이외의 이야기를 만들기가 힘듭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발견된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가공의 세계에서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는 가정 하나만으로 '아니 그러한 방법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다 아는 내용이라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간단히 말해서 작가가 아주 쉽게 싸구려 천재(……)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 아닌 장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주인공을 소년 만화처럼 천천히 성장시키거나 처음부터 먼치킨 속성을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줄거리 진행이 매우 부드럽게 진행됩니다.


3. 시청자 수용성 확보 수월

  사실 위에 설명한 구상의 용이함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저러한 자유도와 구성 난이도의 하락에 따른 대가로 세계관을 더욱 튼튼하게 구성해야 하는 어려움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찌어찌 구성까지 잘 넘어갔다고 치더라도, 그 세계관을 시청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작품을 설정하고 연출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문제로 다가옵니다. 국내 판타지 소설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드래곤 라자조차 D&D의 설정을 일부 차용하였을 정도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흔히 핍진성이라고도 하는데, 시청자가 그 이야기의 진행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구성을 하느냐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세계물은 이 문제점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냥 RPG게임 등에서 자주 사용하는 판타지 세계관을 대 놓고 사용(도용)하는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하니까요. 왜냐하면 시청자가 되리라 기대할 수 있는 수요층의 상당수가 이미 그 세계관에 익숙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설정 설명을 고민하지 않아도 신이 존재하고 마법을 쓰며 이종족이 있고, 나아가서는 스킬과 레벨이 있는 '그 세계'의 설정에 이미 시청자들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작가보다 세계관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있는 시청자들이 널려 있는 수준이니까요. 기사는 당연히 있는 직업이며, 도적이 어떠한 방법으로 잠긴 문을 따는지를 묘사해야 할 고민도 필요 없습니다. '문 따기(Unlock)' 스킬로 땄다 묘사하면 끝입니다. 

  세계관 설정 역시 매우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세계물의 귀족 작위 명칭은 무조건 오등작이 기준입니다. 오등작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작위로 구성된 작위로 기원은 고대 중국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작위의 명칭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작위의 운영은 중~근세의 유럽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사실 이건 서양의 작위를 일본에서 자신들이 익숙한 오등작 제도를 바탕으로 해석하여 명칭을 붙인 것이 그 유래입니다. 그렇다 보니 중~근세 유럽의 작위 체계와 중국의 오등작 체계가 섞여 귀족 사회의 묘사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작가와 시청자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그러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미 배경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세계이기에 어느 정도의 위화감이나 설정 부족은 알아서 메우고 넘어갑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가치관에 대한 설명 부담이 적은 것도 장점입니다. 왜냐하면 작가 자신을 반영한 주인공(오너캐)이나 주 시청자층(이라 생각되는)을 반영한 주인공을 이세계로 소환시켜 버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이 넘어갔으므로 현대인인 시청자가 몰입하기 위한 별도의 장치가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작가의 생각대로 작품의 주인공을 행동시키면, 시청자는 몰입하거나 몰입하지 못하더라도 최소 주인공의 행위에 대한 원인은 납득은 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작품 내에 많은 장치를 설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4. 작품에 대한 낮은 기대치에 따른 적은 부담

  우리나라에서 한 때 유행하던 영지물(주인공이 영지를 경영, 발전시키는 장르)이 '앞산의 드래곤을 털어서 금은보화를 유통시키면 인플레이션은 일어나지 않는가', '뒷산의 드워프에게 무기를 만들게 한다면 무기의 제조와 원재료 확보(원재료 광산의 확보 외에도 재료의 채굴, 가공 등)에 시간이 그렇게 짧게 걸릴 수 있는가', '중세 유럽 기반의 판타지 배경 작품이 삼국지도 아니고 유랑민 모아 30만 군대 생성이 말이 되는가' 등의 다양한 비판을 받은 것과 달리, 이세계물에는 그러한 비판이 없습니다. 일단 소수 비판의 목소리는 애니메이션화 되기 전 소설 또는 만화 단계에서 제기되니 막상 애니메이션이 나오면 그러한 부분의 지적이 추가로 나오지도 않고, 무엇보다 다들 그러한 부분까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장르의 애니메이션에 치밀한 설정 자체를 기대하지 않고, 단순히 소비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적당히 참신해 보이는 소재 하나를 가지고 이세계를 배경으로 캐릭터 잘 뽑아서 작품 하나 만들어보자'가 이세계물 애니메이션에 암묵적으로 깔려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적당히 참신해 보이는 소재'와 '잘 뽑은 캐릭터'는 원작인 소설(라이트 노벨) 또는 만화에서 원판을 가져오면 되니 더욱 고민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사에게 이세계물은 고정 팬이 확보되어 있고, 작품의 완성도를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원작에서의 캐릭터성을 잘 살려 만들면 되는 작품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싶습니다.


5. 결론

  굳이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는 소설 및 만화 작가들의 수준 저하 문제, 애니메이션 감독 및 기획자의 질적 문제까지는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세계물 장르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설이나 만화처럼 소수의 작가가 투입되어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면 차라리 문제가 덜 하지 않을까 싶은데, 다수의 애니메이터와 성우, 방송 채널 및 일정까지 확보하여야 하는 애니메이션에 이세계물이 범람하기 시작하니 안타깝네요. 이세계물 장르 자체가 요즘 유행이기도 하고, 시청자가 원하는 장르이므로 한 동안은 이러한 경향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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