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5

울산 가볼 만한 곳│학성공원(울산왜성)│동측(입구 및 노대)


 학성공원(울산왜성)

 • 공원 동측(입구 및 노대)

 • 공원 북측(이지환 및 삼지환)

 • 공원 중앙부(본환 및 외곽)


  울산왜성(蔚山倭城)은 1597년 정유재란 시기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축성한 시설로, 당시 조선에서는 울산왜성의 생김새가 섬처럼 생겼다고 하여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렀었습니다. 학성(鶴城)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인 학성산(鶴城山)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사적 9호, 사적명 '울산 학성'으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1997년 지정해지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적(史蹟) 제도가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가 지정하던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른 고적(古蹟) 지정물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입니다. 울산왜성은 문화재보호법의 정의에 언급된 국가적, 민족적 또한 세계적 유산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으며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크지도 않은 시설이므로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무가치한 시설까지는 아니므로 현재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하여 지방자치단체 주도 하에 해당 시설의 정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정유재란 시기 이곳에서 두 차례 전투가 벌어졌었는데, 1597년 벌어진 전투는 매우 치열하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결과적으로 왜군이 수성을 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왜군 역시 농성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조선군에게 왜성의 방어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전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의 경우 방어 및 농성을 위해 주로 산성을 쌓았었는데, 산성의 경우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건축하고, 주변의 백성들 역시 성 내부로 피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왜성은 오로지 군사 거점의 역할만을 수행하므로 민간인을 보호하는 기능이 전무한 대신, 방어를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지형의 고저차(郭, 구루와(ぐるわ)) 및 경사형 성벽(石垣, 이시가키(いしがき))을 이용하여 건축을 하기 때문에 산지가 아닌 평지의 구릉에도 상당한 방어력을 가진 성을 쌓기가 용이했습니다. 또한 산세의 험준함이 방어력과 직결되다 보니 접근성이 떨어지는 조선의 산성과 달리 왜성은 강이나 바다 근처의 언덕에 축조하더라도 방어력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보급이 용이한 거점에 성을 쌓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학성공원(울산왜성) 지도 1
  울산왜성 역시 축성 당시에는 근처의 태화강(太和江)과 맞닿아 있어 방어 및 보급이 유리하였습니다. 위의 지도는 일본 잡지인 「역사군상(歴史群像)」 2017년 4월호에 실렸던 울산성 공방전 기사에 실린 울산왜성의 지도를 현재 학성공원의 지도와 합성하여 만들었습니다. 겨우 50m 남짓한 고도인 학성산의 낮은 지형을 잘 이용하여 각종 방어시설을 만들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성공원(울산왜성) 지도 2
  학성공원의 산책도 겸해서, 울산왜성의 흔적을 천천히 살펴보았습니다. 탐방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먼저 현재는 공원 입구가 된 북동쪽의 노대부터 배를 대던 선입지(船入址, 후나이리(船入り, ふないり)) 및 본환(本丸, 혼마루(ほんまる)) 입구 부위를 살펴보고,
② 이지환(二之丸, 니노마루(二ノ丸, にのまる)) 및 삼지환(三之丸, 산노마루(三ノ丸, さんのまる))을 살펴본 뒤
③ 본환(本丸) 및 외곽부위를 둘러보는 방식으로 탐방을 진행하였습니다.

  왜성의 시설물을 설명할 때 일본어 이름은 처음 설명할 때를 제외하고 가급적 사용을 자제할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말로 대체할 간단한 단어가 없는 경우 또는 길게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 경우는 원 단어를 그대로 사용할 예정이오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본 글로 들어가기 전, 울산왜성을 5년 전에 돌아보았던 일본인 블로거의 게시물도 함께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 해당 블로그의 링크를 첨부합니다. 저분은 제가 걸어 다닌 방향과 반대쪽에서부터 탐사를 시작하셨던데, 아무래도 왜성의 본고장(?)에서 오신 분이다 보니 제가 보았을 때는 미처 알지 못해 지나친 부분까지 세밀하게 짚어 주시더라고요. 

공원 입구 경사형 성벽
  공원 입구 쪽의 경사형 성벽입니다. 일본에서는 이시가키(石垣, いしがき)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돌담이라는 뜻입니다. 적의 침공을 막기 위한 장벽이자, 높게 쌓은 인위적인 지형인 구루와(郭, ぐるわ)를 지지하기 위한 석축이기도 한 시설물입니다. 만약 이시가키가 없다면 흙만으로 높은 경사의 토산을 만들어야 하는데, 유지보수도 힘들뿐더러, 이시가키를 만들었을 때만큼 급경사면을 가진 왜성을 축조하기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장 옆 쪽 석벽이 무너져 흙만 남아 잔디로 덮어 둔 부분만 보아도 성벽의 경사도보다 완만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로 근처 경사형 성벽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경사형 성벽의 모습을 조금 더 살펴보았습니다. 왜성은 몇 개의 구루와가 모여 하나의 성을 이루게 되는 형태이므로, 성벽이 얼마나 잘 보전되어 있느냐에 따라 성의 다른 구조물들도 잘 남아있을 수 있는가가 결정됩니다.

야구라 부분 경사형 성벽
  이 경사형 성벽은 야구라(櫓, やぐら)의 일부분입니다. 단어의 의미만으로 직역하면 망루라는 뜻입니다. 야구라는 우리나라 성곽의 치(雉)와 용도가 비슷한 구조물로, 성벽의 일부가 돌출되어 있어 적을 보다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구조물입니다. 돌출되어 만들어지는 구조물의 특징상 오래 보존되기가 힘든 편인데, 비록 기단부에 한정해서이지만 구조물이 꽤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사형 성벽 모서리
  왜성 특유의 각진 모서리돌이 인상적입니다. 모서리돌은 경사형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을 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저렇게 위의 사진처럼 깔끔하게 다듬어두지 않으면 적이 타고 올라오기 쉽거나 성을 무너뜨리기 쉬울 수 있기 때문에 왜성의 모서리돌은 일반적으로 위와 같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공원 입구
  다시 공원 입구 쪽으로 돌아와, 망루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저기 무너지고 기단부만 남은 왜성의 성벽이 보입니다.

입구 쪽 산책로
  입구 쪽은 올라오기 쉽도록 완만한 경사를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망루가 위치하였던 곳
  망루 위의 모습입니다. 망루 바로 위로는 목재 울타리가 쳐져 있어 올라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떨어질 위험이 크니 출입을 제한하는 게 맞지만 기왕 울타리를 만들 거면 망루의 일부를 복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망루 아래 성벽도 마저 복원해야 하는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왜성을 굳이 복원할 필요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겠다 싶었습니다.

망루 안내판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왜성의 유지 및 보수와 복원은 참 애매한 문제입니다. 유지보수를 안 하자니 나름 역사적 의의가 있는 시설물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복원을 하자니 딱히 그 정도의 역사적 가치는 없고…… 그냥 지금처럼 최소한의 정비만 하는 것이 최선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여기는 왜성이라는 시설물의 보존 공간이라기보다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공원의 미관 정비 차원에서 지금처럼 관리하는 것 정도가 알맞은 것 같습니다.

망루 남측
  망루의 남측 모습입니다. 성벽이 상당히 유실되었기 때문에 구루와가 무너져서 성벽 밑이 꽤 흙으로 덮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환 외곽부
  망루에서 바라본 본환(本丸) 외곽부의 모습입니다. 공격자가 어떻게 이곳을 점령하더라도 첩첩으로 쌓인 성벽을 보면 가슴이 답답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저 외곽부 사이에도 성벽이 하나 더 있었고, 성벽 위에 나무로 목책(木柵)을 둘러놨었기 때문에 더욱 갑갑하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산책로 안내판
  망루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본성 출입구와 선입지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
  지금이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이 길 주변이 모두 성벽이었을 것입니다.

입구(마스가타코구치) 유적
  대부분이 무너지고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어 쉽게 보아서는 알기가 힘든데, 울산왜성의 출입로는 모두 수비자가 더 높은 고지에 있는 다른 왜성의 구조물에서 공격자를 감시 및 공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왜성에서 다음 단계로 높은 성곽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특정 공간을 지나가야만 하는데, 이를 마스가타코구치(枡形虎口, ますがたこぐち)라고 부릅니다. 이 구조물로 들어오는 공격자들은 우선 들어가기 전에 옆에 있는 성벽 또는 망루에서 공격을 받아야 하고, 기껏 이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해당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위의 수비자들에게 공격을 또 받아야 합니다. 게다가 문도 들어오는 문과 일직선이 아니라, 90도 꺾어져 만들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공격자는 세 방향에서 공격하는 수비자들을 물리치며 왼쪽 또는 오른쪽의 문을 열어야 하는 난도 높은 임무를 수행해야만 합니다. 이곳 역시 성벽을 따라가면 길이 급격하게 꺾이게 되어 있고, 성벽도 첩첩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아 해당 구조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꽤 높아 보였습니다.

입구 부근 성벽 유구
  지금은 거의 다 무너져 얼핏 보면 돌담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요. 

남동측 출입구
  남동쪽 방향에서 공원으로 들어오기 위한 출입구입니다.

선입지 가는 길
  저 길로 죽 따라가면 선입지가 나옵니다. 

학성역사체험탐방로 안내판
  입구 쪽이다 보니 공원 안내 팻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본성 출입구 안내판
  실제로 이곳에 마스가타코구치가 있었다고 하네요. 저런 이중 출입문이 이 성에는 몇 군데나 더 있었습니다. 왜성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군이 이 성을 공격할 때 피해가 컸던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선입지 터
  일본군이 왜성의 보급 및 병력 수송을 위해 배를 세우던 장소인 선입지(船入址)입니다. 후나이리(船入り, ふないり)라고도 부르는데, 거대한 자연석이 인상적입니다. 경사형 성벽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목책으로 방어하였거나, 작은 규모로 성벽을 세웠었지만 모두 훼손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이야 육지 가운데로 보이지만, 예전에는 이곳까지 태화강이 들어왔었기 때문에 만들어졌던 시설물입니다.

선입지에서 바라본 본환
  여기에서도 본환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입니다. 왜성이 버려진 지 몇백 년이 지난 지금이야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나무가 여기저기 많이 있지만, 원래 이곳이 성으로 기능할 때에는 저 나무들은 모두 없었기 때문에 까마득한 돌벽과 언덕만이 보였을 것입니다.

노보리이시가키
  왜성의 특징 중 하나인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 のぼりいしがき)입니다. 현재는 사진 오른쪽의 산책로에 의해 끊어져 있지만, 원래는 태화강변까지 이 성벽이 이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적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성벽을 쌓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노보리이시가키는 산 정상부터 산기슭까지 세로로 만들어지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시설물은 적에게서 선입지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세로로 만들어진 성벽 때문에 공격자들은 선착장 근처에 다가가기가 힘들고, 성벽으로 인해 공격자가 분리되다 보니 수비자들이 높은 본환 또는 다른 구루와 위의 성벽에서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각개격파가 가능하다는 방어적 이점을 가져다주는 구조물입니다. 노보리이시가키는 일본에서도 잘 남아있지 않은 성곽 형태이며, 임진왜란 때 왜성을 지으면서 처음 고안되지 않았을까 추정되는 시설물입니다.

노보리이시가키 옆 계단
  노보리이시가키를 지나 바로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딱 보아도 성벽으로 사용되던 돌들로 보입니다. 지금이야 계단 덕분에 위로 편하게 올라갈 수 있지만, 이곳이 왜성이었을 땐 아까 보았던 선입지 옆 출입문을 거쳐야만 이곳으로 이동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환 출입구 안내판
  본환의 출입구입니다. 이곳 역시 마스가타코구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본환의 높은 성벽 때문에 아래의 입구보다 훨씬 공격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틈에 자란 잡초
  성벽 틈 사이마다 풀이 많이 자라 있습니다.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는 첫 번째 원인이 바로 저런 풀 때문입니다.

축성 방식 확인
  일반적인 일본의 성과 마찬가지로 돌 사이를 점토나 회 등으로 채워 접착하지 않고, 흙으로 된 토대 위에 자갈을 깔고 큰 돌로 성벽을 쌓으며 작을 돌로 사이를 채우는 방식으로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내 자연석 활용
  자연석을 따로 파내지 않고, 그것을 활용하여 성벽을 쌓아 둔 모습입니다. 자연석만큼 성을 적게 쌓아 좋아 보이지만, 사실 성의 방어력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하지만 왜군 입장에서는 축성 기간이 촉박했고, 동원할 수 있는 인력과 장비에 한계가 있다 보니 선택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본환 입구 부근
  본환 입구 부근의 모습입니다. 성벽 중간마다 나무가 자라나 있습니다. 성을 가장 잘 무너뜨리는 진정한 적은 병사들이 아니라, 식물입니다.

본환 외곽부 성벽 1
  본환 외곽 주변부의 성벽은 그래도 관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본환 외곽부 성벽 2
  산비탈 위에 성벽이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왜성은 성벽이라기보다 석축처럼 보입니다. 

본환 외곽부 성벽 3
  지금은 성벽만 남아있지만, 예전에는 저 위에 목책이 설치되어 있어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김홍조 공덕비 안내판
  본환 입구에서 삼지환 쪽으로 가는 길목에는 김홍조 공덕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울산왜성 터를 사들여 공원화하신 분으로, 이 분 덕분에 이 유적지가 공원의 형태로나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김홍조 공덕비
  우리나라 양식의 공덕비와 뒤편 왜성의 성벽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원 자체는 크지 않지만 여기저기 살펴볼 부분이 많아 게시물을 분리하였습니다. 내용을 더 확인하고 싶은 분들께서는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울산왜성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공원3길 54

울산광역시 울산관광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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