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50년 정도의 수령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 회화나무입니다. 조선 현종 시기(1660년대)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대전광역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일자가 2010년이니 360여년 정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나무의 수령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우니 약간의 세월은 무시하고 350년으로 말해도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학자수로 여겨졌으며, 성리학이 융성하던 조선 시기에는 상당히 귀한 취급을 받던 나무였습니다. 아마 이 나무도 그러한 이유 덕에 이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회화나무를 등지고 매봉산을 바라보면 김익희의 묘가 바로 보입니다. 묘소는 산의 남면, 양지바른 곳에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풍수는 잘 모르기에 저 자리가 좋다 나쁘다 이야기할수는 없지만, 음택지로 상당히 좋은 곳 같이 보였습니다. 다만 택지 바로 측면에 비가 올 때마다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물길이 생겨난다는 점이 약간 거슬리기는 하네요.
공원 입구입니다. 비바람을 맞으며 깔끔하게 유지될 수 없는 재질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정비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공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묘소와 재실(긍사재), 신도비 등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각 시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설명문 뒤쪽에 보이는 돌은 하마비(下馬碑)입니다. 참고로 본 묘소는 1985년부터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57호로, 1989년부터는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소속이 바뀌게 된 사유는 1989년 충청남도 대덕군이 폐지되고 충청남도 대전시가 대덕군의 대부분을 편입하여 대전직할시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행정구역이 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습니다. 이 중 사진 우측의 큰 신도비가 1712년 세워진 비석으로, 송시열이 지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비석의 글 우측 두 번째 행을 살펴보면 송시열의 이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김익희의 생애를 살펴보면 송시열이 신도비의 비문을 지을 만한 관계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송시열은 김익희의 할아버지인 김장생의 제자이고, 김장생은 이이와 성혼에게서 수학하였던 서인의 사상적 거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인의 학문적 계보를 따질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집안 사람의 신도비를 당대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이 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좌측의 비석은 최근에 다시 건립한 비석이라고 합니다.
대문의 모습입니다. 입구는 한 칸이며, 솟을삼문의 형태입니다.
재실인 긍사재는 낮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어 이 대문을 통하여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솟을대문 형태의 입구가 정갈하게 보입니다.
재실인 긍사재는 낮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어 이 대문을 통하여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솟을대문 형태의 입구가 정갈하게 보입니다.
옆에 새로 세운 건물 역시 재실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우리의 풍속은 많이 변화하였지만, 격식을 갖춘 제례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느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별도로 준비해야 하는 품목도 늘어나고, 후손의 수도 늘어나고 있으니 건물이 더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묘소의 묘비와 문인석입니다. 김익희 본인도 당대에 이름 높은 문신이자 학자였지만, 후손들 역시 번창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창주사적공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덕대로 507-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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