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5

대전 가볼 만한 곳│창주사적공원


창주사적공원
  김익희(金益熙)는 조선 인조와 효종 시기(17세기) 이조판서와 형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등의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던 문신으로, 호는 창주(滄洲)이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입니다. 할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으로 선조 시기부터 광해군, 인조 시기까지 활약하여 훗날 문원공(文元公)으로 추증되고 훗날 문묘에 배향되는 유명한 관료 겸 학자이며, 큰아버지들 중 유명한 분으로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분이라 상대적으로 비교되어 보이지만, 김익희님 역시 병자호란을 겪으며 혼란이 극에 달한 나라를 위하여 일생을 투신하였던 훌륭한 분입니다.

호텔 오노마
  마침 대전교육과학연구원에 방문할 일이 있어 공원화된 김익희의 묘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대전교육과학연구원
  창주사적공원은 대전교육과학연구원 건물 뒤편, 매봉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올려다본 창주사적공원
  공원 근처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가정동 회화나무 보호수
  약 350년 정도의 수령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 회화나무입니다. 조선 현종 시기(1660년대)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대전광역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일자가 2010년이니 360여년 정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나무의 수령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우니 약간의 세월은 무시하고 350년으로 말해도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학자수로 여겨졌으며, 성리학이 융성하던 조선 시기에는 상당히 귀한 취급을 받던 나무였습니다. 아마 이 나무도 그러한 이유 덕에 이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김익희의 묘
  회화나무를 등지고 매봉산을 바라보면 김익희의 묘가 바로 보입니다. 묘소는 산의 남면, 양지바른 곳에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풍수는 잘 모르기에 저 자리가 좋다 나쁘다 이야기할수는 없지만, 음택지로 상당히 좋은 곳 같이 보였습니다. 다만 택지 바로 측면에 비가 올 때마다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물길이 생겨난다는 점이 약간 거슬리기는 하네요.

공원 입구
  공원 입구입니다. 비바람을 맞으며 깔끔하게 유지될 수 없는 재질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정비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설명문
  공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묘소와 재실(긍사재), 신도비 등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각 시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설명문 뒤쪽에 보이는 돌은 하마비(下馬碑)입니다. 참고로 본 묘소는 1985년부터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57호로, 1989년부터는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소속이 바뀌게 된 사유는 1989년 충청남도 대덕군이 폐지되고 충청남도 대전시가 대덕군의 대부분을 편입하여 대전직할시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행정구역이 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도비 비각
  신도비와 그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입니다. 신도비는 묘소의 주인이 생전 행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비석으로, 흔히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웁니다.

신도비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습니다. 이 중 사진 우측의 큰 신도비가 1712년 세워진 비석으로, 송시열이 지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비석의 글 우측 두 번째 행을 살펴보면 송시열의 이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김익희의 생애를 살펴보면 송시열이 신도비의 비문을 지을 만한 관계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송시열은 김익희의 할아버지인 김장생의 제자이고, 김장생은 이이와 성혼에게서 수학하였던 서인의 사상적 거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인의 학문적 계보를 따질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집안 사람의 신도비를 당대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이 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좌측의 비석은 최근에 다시 건립한 비석이라고 합니다.

비석 유래
  비각 옆에는 비석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는 작은 비석이 있었습니다. 최초 건립 시기에는 묘소에서 남동쪽으로 50m 떨어진 길가에 신도비를 세웠었으나, 이 지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위치로 비석이 밀려났다고 합니다. 아마 현재 대전과학교육연구원 부지 북쪽 즈음이 원래의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문
  대문의 모습입니다. 입구는 한 칸이며, 솟을삼문의 형태입니다.

대문 정면
  재실인 긍사재는 낮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어 이 대문을 통하여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솟을대문 형태의 입구가 정갈하게 보입니다.

재실 마당
  대문 안쪽에는 긍사재와 최근 세운 듯한 건물이 보였습니다. 긍사재는 재실(齋室)의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로, 후손들이 묘소에 제를 올릴 때 의례를 준비하는 건물입니다. 

새로 세운 건물
  옆에 새로 세운 건물 역시 재실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우리의 풍속은 많이 변화하였지만, 격식을 갖춘 제례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느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별도로 준비해야 하는 품목도 늘어나고, 후손의 수도 늘어나고 있으니 건물이 더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긍사재
  기존의 긍사재가 다섯 칸짜리 건물로 그리 크지 않은 점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처마
  기존의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 모두 팔작지붕에 겹처마이지만, 새로 지은 건물의 처마 및 부연의 길이가 조금 더 짧습니다. 

재실 측면
  측면에서 바라본 긍사재의 모습입니다. 대전교육과학연구원 건물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팔작지붕 측면
  팔작지붕 측면에는 예(禮)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재실은 제례(祭禮)를 위한 건물이니 당연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재실 후면
  긍사재 뒷편의 모습입니다. 굴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내부에 온돌이 설치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재실 후면 전경
  낮은 담장이 인상적입니다. 참고로 묘소와 재실을 지나 계속 올라가면 매봉산 산책로가 나옵니다.

묘소 가는 길
  묘소로 가는 길입니다. 아래 물길 때문에 묘소로 가기 위한 다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적 알림
  본 묘소가 사적임을 알리는 비석과 안내판입니다.

묘비
  묘소의 묘비와 문인석입니다. 김익희 본인도 당대에 이름 높은 문신이자 학자였지만, 후손들 역시 번창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창주사적공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덕대로 507-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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